아일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188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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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일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은 1882년 아일랜드 섬 전체를 대표하는 팀으로 창단되었으나, 1921년 아일랜드 자유국이 분리되면서 아일랜드 자유국과 북아일랜드로 분리되었다. 1882년 잉글랜드와의 첫 국제 경기에서 0-13으로 대패했으며, 1887년 웨일스를 상대로 첫 승리를 거두기 전까지 14번의 패배와 1번의 무승부를 기록했다. 1902-03년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에서 공동 우승, 1913-14년에는 단독 우승을 차지하며 전성기를 맞았다. 1920년 아일랜드 분할 이후에는 두 개의 '아일랜드' 팀이 존재했으며, 1950년 FIFA 월드컵 예선을 기점으로 북아일랜드와 아일랜드 공화국 선수로 팀을 구성했다. 엘리샤 스콧은 31경기로 최다 출장 선수이며, 빌리 길레스피는 13골로 최다 득점 선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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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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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FA 코드 | EIR |
사용 기간 | 1882년–1950년 |
협회 | 아일랜드 축구 협회 |
홈 경기장 | 윈저 파크, 랜즈다운 로드, 솔리튜드, 얼스터 크리켓 경기장, 벨파스트 셀틱 파크 |
통계 | |
최다 출전 | 엘리샤 스콧 (31회) |
최다 득점 | 빌리 길레스피 (13골) |
Elo 최고 순위 | 4위 |
Elo 최고 순위 날짜 | 1882년–1885년 |
Elo 최저 순위 | 37위 또는 41위 |
Elo 최저 순위 날짜 | 1923년 또는 1946년 |
경기 기록 | |
첫 경기 | 아일랜드 0–13 잉글랜드 ( 벨파스트, 아일랜드; 1882년 2월 18일) |
마지막 경기 | 웨일스 0–0 아일랜드 ( 렉섬, 웨일스; 1950년 3월 8일) |
최대 점수차 승리 | 아일랜드 7–0 웨일스 ( 벨파스트, 아일랜드; 1930년 2월 1일) |
최대 점수차 패배 | 아일랜드 0–13 잉글랜드 ( 벨파스트, 아일랜드; 1882년 2월 18일) |
2. 역사
1882년 아일랜드섬 전체를 대표하는 축구팀으로 창단되었으나, 1921년 아일랜드 자유국이 분리됨에 따라 아일랜드 자유국 국가대표팀과 분리되어 북아일랜드만으로 국한되었다.
1920년 아일랜드 분할로 북아일랜드와 남아일랜드가 분리되었고, 1922년 아일랜드 남부는 아일랜드 자유국을 거쳐 아일랜드 공화국이 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격변 속에 1921년 더블린에서 아일랜드 축구 협회(FAI)가 등장하여 별도의 리그와 국가대표팀을 조직했다.[9] 1923년, FAI는 "아일랜드 자유국 축구 협회"라는 이름으로 FIFA의 인정을 받았다.[9]
동시에, IFA는 계속해서 전 아일랜드 차원에서 국가대표팀을 조직하고 자유국 선수들을 정기적으로 소집했다.[9] 1936년부터 FAI는 자체적인 전 아일랜드 팀을 조직하기 시작했고,[9] 두 팀은 '아일랜드'라는 이름으로 경쟁하며 39명의 이중 국적 선수가 양 팀 모두에서 뛰었다.[9]
1928년부터 1946년까지 IFA는 FIFA에 가입하지 않았고, 두 '아일랜드' 팀은 공존하며 같은 대회에서 경쟁하지 않았다.[9] 1949년에야 두 팀 모두 1950년 월드컵 예선에 참가했다.[9]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모든 홈 인터내셔널 경기가 중단되었지만, 아일랜드는 연합군 11명과 비공식 경기를 치렀다.[9][18]
1946년, 홈 네이션스가 공식 경기를 재개했을 때, 잉글랜드 FA는 각 협회에 관할 구역의 선수만 선택하도록 요청했다.[20] FAI는 이에 응했지만 IFA는 그렇지 않았고, 1949-50 시즌까지 자유국 출신 선수들을 계속 선발했다.[20]
1949–50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이 월드컵 예선 조로 사용되면서, IFA는 렉섬의 레이스코스 그라운드에서 열린 웨일스와의 경기에서 마지막으로 아일랜드 전체 선수로 구성된 팀을 출전시켰다.[21] 이 팀에는 아일랜드 자유국 출신 4명의 선수가 포함되었는데, 이들은 모두 이전에 FAI 대표팀으로 출전한 경험이 있어, 같은 월드컵 예선에서 두 협회 소속으로 뛰는 상황이 발생했다.[21]
이후 FAI는 아일랜드 공화국 출신 선수들이 IFA에서 뛰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22]
IFA와 FAI 팀은 모두 ''아일랜드''라는 이름으로 계속 경쟁했다. 1953년 FIFA는 두 팀 모두 ''아일랜드''로 지칭될 수 없다고 판결하고, FAI 팀은 ''아일랜드 공화국''으로, IFA 팀은 ''북아일랜드''로 지정했다.[27][28] IFA는 이에 반대했지만, 1954년에는 1923년 합의에 따라 홈 경기에서 ''아일랜드''라는 이름을 계속 사용할 수 있었다.[29] 이 관행은 1970년대 후반에 중단되었다.[30]
1950년 선수 선발을 중지하였으며, 북아일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으로 이어진다.
2. 1. 초기 (1882년 ~ 1914년)
1882년 2월 18일, 아일랜드 축구 협회(IFA) 창립 2년 후, 아일랜드는 잉글랜드를 상대로 벨파스트의 블룸필드 파크에서 첫 국제 경기를 치렀으나 0-13으로 크게 졌다.[5] 이 경기는 잉글랜드의 역대 최다 점수 차 승리이자 아일랜드의 역대 최다 점수 차 패배였다. 당시 아일랜드 대표팀에는 15세 154일의 새뮤얼 존스턴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는 최연소 국제 경기 데뷔 선수로 기록되었다. 1882년 2월 25일, 아일랜드는 렉섬의 레이스코스 그라운드에서 웨일스를 상대로 두 번째 경기를 치렀고, 존스턴의 동점골은 아일랜드의 첫 득점이 되었지만, 1-7로 패했다.1884년, 아일랜드는 첫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에 참가했지만 3경기 모두 패했다.[5] 1887년 3월 13일, 벨파스트에서 웨일스를 4-1로 꺾고 첫 승을 거두었다. 하지만 이후에도 1888년 3월 3일 웨일스에 0-11, 1901년 2월 23일 스코틀랜드에 0-11로 패하는 등 잦은 대패를 겪었다.
그러나 긍정적인 순간도 있었다. 1891년 2월 7일, 잭 레이놀즈와 올퍼트 스탠필드의 활약으로 웨일스를 7-2로 꺾고 두 번째 승리를 거두었다. 1894년 3월 3일, 솔리튜드 그라운드에서 잉글랜드와 2-2 무승부를 기록하며 선전했다.
아일랜드는 19세기 동안 어린 선수들을 많이 기용했다. 쇼 길레스피는 18세의 나이로 19세기 최연소 골키퍼가 되었고,[6] 스탠필드와 W.K. 깁슨, 조지 가우크로저는 17세에 데뷔했다. 스탠필드는 30경기에 출전하여 19세기 최다 출전 기록을 세웠다.
1899년, IFA는 비거주 선수 선발 규칙을 변경하여 잉글랜드에서 뛰는 선수들을 선발하기 시작했다.[7] 1903년 3월 28일, 아치 굿올은 38세 283일의 나이로 웨일스와의 경기에서 득점하며 최고령 득점자가 되었다. 이 골에 힘입어 아일랜드는 1902–03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에서 잉글랜드, 스코틀랜드와 함께 공동 우승을 차지했다.
1913년 2월 15일, 윈저 파크에서 잉글랜드를 2-1로 꺾고 사상 처음으로 잉글랜드를 상대로 승리했다. 1914년에는 웨일스를 원정에서 2-1로 이기고, 미들즈브러의 에어섬 파크에서 잉글랜드를 3-0으로 완파했으며, 스코틀랜드와 1-1로 비기면서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에서 단독 우승을 차지했다.

후열(좌-우): Val Harris, Fred McKee, Davy Rollo, Patrick O'Connell
전열(좌-우): Ted Seymour, Sam Young, Billy Gillespie, Alex Craig, Bill Lacey, Louis Bookman, Bill McConnell
2. 2. 전간기 (1919년 ~ 1939년)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영국 홈 챔피언십이 1919년 10월에 재개되었지만, 아일랜드는 1914년 우승 당시의 경기력을 회복하지 못하고, 이후 20년 동안 두 차례 2위를 기록하는 데 그쳤다.[8] 그럼에도 불구하고 톰 파커슨, 샘 어빙, 바비 어빈, 빌리 길레스피를 기용한 팀으로 1923년 10월 10일 윈저 파크에서 잉글랜드를 2-1로 이기는 등 뛰어난 경기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1920년대 동안 빌리 길레스피는 국제 경기에서 13골을 기록하며 아일랜드 축구 협회 기록을 세웠으며, 이 중 7골은 잉글랜드를 상대로 기록했다. 길레스피의 기록은 거의 80년 동안 유지되었다.[8]아일랜드는 초기에는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스코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웨일스 축구 국가대표팀만을 상대로 경기를 치렀지만, 1920년대에는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 노르웨이 축구 국가대표팀, 남아프리카 공화국 축구 국가대표팀 등 다른 팀들과 경기를 치르기도 했다.[9]
1927년 10월 10일, 아일랜드는 잉글랜드를 2-0으로 꺾었지만, 벨파스트에서 웨일스에게 패하며 챔피언십 우승은 좌절되었다. 하지만 1928년 2월 25일, 엘리샤 스콧의 뛰어난 골키핑 덕분에 스코틀랜드를 1-0으로 꺾으며 18년 만에 스코틀랜드를 상대로 첫 승리를 거두었고, 1914년 이후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
1930년 2월 2일, 아일랜드는 조 뱀브릭이 자신의 클럽 홈 구장에서 6골을 기록하며 웨일스를 7-0으로 크게 이겼다. 이는 현재까지 팀의 최고 승리 기록이며, 뱀브릭의 6골은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 역사상 한 경기에서 한 선수가 기록한 최고 득점 기록으로,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다.[7]
하지만 아일랜드는 이후 하위권에 머물렀으며, 제2차 세계 대전 발발로 영국 홈 챔피언십이 다시 중단되기 전까지 세 번만 최하위를 면했다.
2. 3. 아일랜드 분할과 두 개의 '아일랜드' 팀 (1920년 ~ 1950년)
1920년 아일랜드 분할로 북아일랜드와 남아일랜드가 분리되었다. 1922년 아일랜드 남부는 아일랜드 자유국으로 독립했고, 이후 아일랜드 공화국이 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격변 속에서 1921년 더블린에서 아일랜드 축구 협회(FAI)가 등장하여 별도의 리그와 국가대표팀을 조직했다.[9] 1923년, FAI는 "아일랜드 자유국 축구 협회"로 이름을 변경하는 조건으로 FIFA로부터 아일랜드 자유국의 지배 기구로 인정받았다.[9] 동시에, IFA는 전 아일랜드 차원에서 국가대표팀을 계속 조직했으며, 자유국 선수들을 정기적으로 소집했다.[9] 이 시대에 적어도 한 명의 북아일랜드인인 해리 채턴도 아일랜드 자유국을 위해 뛰었으며, 1936년부터 FAI는 자체적인 전 아일랜드 팀을 조직하기 시작했다.[9] 두 팀은 '아일랜드'로 경쟁했으며, 이 시대에 적어도 39명의 이중 국적 선수가 양 팀을 대표하도록 선발되었다.[9] 국가대표팀이 일년에 몇 경기만 치르던 시대에는 프로 선수들이 국제 수준에서 뛸 기회를 거절하는 경우는 드물었다.[9]1928년부터 1946년까지 IFA는 FIFA에 가입하지 않았고, 두 '아일랜드' 팀은 공존하며 같은 대회에서 경쟁하지 않았다.[9] 1949년에야 비로소 두 팀 모두 1950년 월드컵 예선 토너먼트에 참가하게 되었다.[9]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모든 홈 인터내셔널 경기가 중단되었지만, 이 기간 동안 아일랜드는 연합군 11명과 비공식 경기를 치렀다.[9][18]
1946년, 홈 네이션스가 공식 인터내셔널 경기를 재개했을 때, IFA-FAI의 분열이 두드러졌는데, 잉글랜드 FA는 각 협회에 관할 구역의 선수만 선택하도록 요청했다.[20] FAI는 이에 응했지만 IFA는 그렇지 않았고, 9월 28일 벨파스트에서 2-7로 패한 경기에서 두 명의 선수가 9월 30일 더블린에서 0-1로 패한 경기에 다시 출전했다.[20] 11월 27일에는 조니 캐리, 피터 파렐, 콘 마틴을 포함한 26개 카운티에서 태어난 7명의 선수가 IFA 팀의 스코틀랜드와의 0-0 무승부에 출전했다.[20] 그 후 1949–50 시즌까지 IFA는 정기적으로 자유국에서 태어난 5~7명의 선수를 선발했다.[20]

다른 홈 네이션스와 함께 월드컵에 출전하기 위해 FIFA에 재가입했으며, 1949–50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이 예선 조로 사용되었다.[21] 렉섬의 레이스코스 그라운드에서 열린 웨일스와의 경기에서 IFA는 마지막으로 아일랜드 전체 선수로 구성된 팀을 출전시켰다.[21] 이 팀에는 톰 아헌, 레그 라이언, 데비 월시, 그리고 주장 콘 마틴 등 아일랜드 자유국에서 태어난 4명의 선수들이 포함되었으며, 이들 4명은 모두 이전에 자격 경기에 FAI 국제 팀으로 출전한 경험이 있었고, 그 결과 동일한 FIFA 월드컵 토너먼트에서 서로 다른 두 개의 협회에서 뛰었다.[21]
FAI는 현재 아일랜드 공화국이 된 선수들이 IFA의 아일랜드 팀으로 출전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22] 재키 캐리는 1950년 4월에 마지막으로 IFA에서 뛰지 않겠다는 약속에 서명했다.[22] FAI 규정 35(b)는 공화국에 기반을 둔 선수들이 유사한 약속을 하지 않는 한 해외 이적에 대한 승인 증명서를 거부하도록 규정했다.[23] IFA는 FIFA에 불만을 제기했고, 1951년 4월 FIFA는 FAI 규정 35(b)가 자사 규정에 위배된다고 답했지만, IFA 팀이 "에어" 시민을 선택할 수 없다고 답했다.[24] 1923년 IFAB가 리버풀에서 맺은 합의로 인해 4개의 홈 네이션 간의 관계에 FIFA가 개입하는 것을 막았기 때문에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 경기는 예외였다.[25] 그러나 이 예외는 "아일랜드 F.A.가 반대하지 않는 경우"에만 적용될 것이며,[24] 결코 활용되지 않았다.
IFA와 FAI 팀은 모두 계속해서 ''아일랜드''로 경쟁했다. FIFA 1953년 총회에서 규정 3이 개정되어 국제 팀은 "정치적, 지리적으로 인정되는 국가 또는 영토의 명칭"을 사용해야 했다.[25] FAI는 처음에는 규정 3에 따라 ''아일랜드''라는 이름을 사용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지만[26] (참고: 아일랜드 국가의 이름), FIFA는 이후 두 팀 모두 ''아일랜드''로 지칭될 수 없다고 판결하고 FAI 팀은 공식적으로 ''아일랜드 공화국''으로 지정하고, IFA 팀은 ''북아일랜드''로 지정하도록 결정했다.[27][28] IFA는 이에 반대했고, 1954년에는 1923년 합의에 따라 홈 인터내셔널 경기에서 계속해서 ''아일랜드''라는 이름을 사용할 수 있었다.[29] 이 관행은 1970년대 후반에 중단되었다.[30]
2. 4. 1950년 이후
1950년 FIFA 월드컵 예선을 기점으로, 아일랜드 축구 협회(IFA)는 북아일랜드 선수만, 아일랜드 축구 협회(FAI)는 아일랜드 공화국 선수만 선발하게 되었다.[21] FAI는 아일랜드 공화국 출신으로 영국에서 활동하는 선수들이 IFA에서 뛰지 않겠다는 약속에 서명하도록 압력을 가했고, 재키 캐리가 1950년 4월에 마지막으로 이 약속에 서명했다.[22] FAI 규정 35(b)는 공화국 기반 선수들이 이러한 약속을 하지 않으면 해외 이적 승인을 거부하도록 규정했다.[23]IFA는 FIFA에 불만을 제기했고, 1951년 4월 FIFA는 FAI 규정 35(b)가 FIFA 규정에 위배되지만, IFA 팀은 "에어" 시민을 선택할 수 없다고 답했다.[24] 그러나 1923년 국제 축구 협회 평의회(IFAB)가 리버풀에서 맺은 합의 때문에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 경기는 예외였다.[25] 이 예외는 "아일랜드 F.A.가 반대하지 않는 경우"에만 적용되었지만,[24] 실제로 활용되지는 않았다.
IFA와 FAI 팀은 모두 ''아일랜드''라는 이름으로 계속 경쟁했다. 1953년 FIFA 총회에서 규정 3이 개정되어 국제 팀은 "정치적, 지리적으로 인정되는 국가 또는 영토의 명칭"을 사용해야 했다.[25] FAI는 규정 3에 따라 ''아일랜드''라는 이름을 사용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지만,[26] FIFA는 두 팀 모두 ''아일랜드''로 지칭될 수 없다고 판결했다. FIFA는 FAI 팀을 공식적으로 ''아일랜드 공화국''으로, IFA 팀을 ''북아일랜드''로 지정했다.[27][28] IFA는 이에 반대했고, 1954년에는 1923년 합의에 따라 홈 경기에서 ''아일랜드''라는 이름을 계속 사용할 수 있었다.[29] 이 관행은 1970년대 후반에 중단되었다.[30]
3. 홈 구장
1899년까지 아일랜드는 모든 홈 경기를 벨파스트에서 치렀으며, 첫 경기는 블룸필드에서 열렸다. 1880년대에 열린 후속 홈 경기는 얼스터 F.C.의 홈 구장인 'Ballynafeigh Park'로도 알려진 얼스터 크리켓 그라운드에서 열렸다. 1890년대에는 클리프턴빌의 홈 경기장인 솔리튜드 그라운드에서 11번의 홈 경기가 열렸다. 20세기 초에는 디스틸러리의 당시 홈 구장이었던 그로스베너 파크와 발모랄 쇼그라운드에서도 가끔 국제 경기가 열렸다.
1900년 3월 17일 성 패트릭의 날, 아일랜드는 더블린에서 첫 경기를 치렀으며, 랜스다운 로드에서 잉글랜드에 0-2로 패했다.[31] 1904년 3월 26일 아일랜드는 북 더블린의 달리마운트 파크에서 첫 경기를 치렀으며, 스코틀랜드와 1-1로 비겼다. 1904년에서 1913년 사이, 아일랜드가 2번 이상의 홈 경기를 치렀던 해에는 달리마운트에서 최소 한 번의 아일랜드 국제 경기가 열렸다. 나머지 경기는 1905년에 완공된 윈저 파크에서 치러졌다. 아일랜드 분할 이후, 모든 후속 홈 경기는 벨파스트에서 주로 윈저 파크에서 열렸지만, 때때로 벨파스트 켈틱의 홈 구장인 켈틱 파크에서 열리기도 했다.
4. 유니폼과 엠블럼
아일랜드는 처음부터 녹색, 흰색, 파란색을 포함한 다양한 색상을 사용했다. 첫 번째 색상은 "로열 블루 저지와 호스, 그리고 흰색 반바지"였다.[32] 제1차 세계 대전 이전부터 1931년 9월까지는 성 파트리치오 블루가 주된 색상이었다. 파란색은 노르만 시대부터 아일랜드의 국가적인 색상이었으며, 더블린 GAA, 레인스터 럭비, 더블린 시티 FC를 포함한 다른 여러 아일랜드 스포츠 팀에서도 사용되었다.[33][34] 1931년에는 셔츠가 녹색으로 변경되었으며, 이는 현재의 북아일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이 여전히 착용하는 색상이다. 변경의 공식적인 이유는 파란색을 사용하던 스코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서였다.[35]
초기 아일랜드의 색상 | |
아일랜드의 초기 로고는 중앙에 하프가 있는 양식화된 켈트 십자였으며, 현대적인 형태로는 현재 팀에서 사용하고 있지만, 이는 193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 샤무록 배지로 대체되었다. 이 변화는 IFA와 FAI가 모두 아일랜드라는 이름을 사용하던 시기에 발생했으며, 이 당시 샤무록은 FAI의 국가대표팀에서도 사용되었다.
5. 주요 기록
아일랜드 축구의 가장 큰 성공은 1913–14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에서 우승했을 때였다. 아일랜드는 1902–03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에서 잉글랜드, 스코틀랜드와 공동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1899년 IFA는 비거주 선수 선발에 관한 규칙을 변경하여 잉글랜드에서 활동하는 아일랜드 선수들을 선발했다. 이 정책 변화는 1903년 아치 굿올이 38세 283일의 나이로 웨일스와의 경기에서 골을 넣어 아일랜드 역사상 최고령 득점자가 되는 기록을 세우는 데 기여했다.
1913년 발 해리스가 주장으로 활약하고 빌리 길레스피가 두 골을 넣은 아일랜드 팀은 윈저 파크에서 2–1로 잉글랜드를 처음으로 이겼다. 1914년에는 패트릭 오코넬과 빌 레이시 등이 팀에 합류하여 챔피언십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아일랜드는 1914년 우승 시즌의 폼을 되찾지 못했지만, 1920년대에 빌리 길레스피는 국제 경력에서 13골을 기록하며 아일랜드 축구 협회 기록을 세웠다. 이 기록은 1992년 콜린 클라크에 의해 동률을 이루었고, 2004년 데이비드 힐리에 의해 깨졌다.
1930년 조 뱀브릭은 클럽 홈 구장에서 웨일스를 상대로 7골 중 6골을 기록하며 팀의 7-0 승리를 이끌었다. 이는 현재까지 팀의 최고 승리 기록이며, 뱀브릭의 6골은 대회 역사상 한 경기에서 한 선수가 기록한 최고 득점 기록이다.
1920년 아일랜드는 분할되어 북아일랜드와 남아일랜드로 나뉘었고, 1922년에는 아일랜드 남부가 아일랜드 자유국으로 독립했다. 이후 더블린에서 아일랜드 축구 협회(FAI)가 등장하여 국가대표팀을 조직했다. 두 팀은 '아일랜드'라는 이름으로 경쟁했으며, 이 시기에 적어도 39명의 이중 국적 선수가 양 팀에서 모두 뛰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모든 홈 인터내셔널 경기가 중단되었지만, 이 기간 동안 아일랜드는 연합군 11명과 비공식 경기를 치렀다.
1946년 홈 네이션스가 공식 인터내셔널 경기를 재개했을 때, IFA-FAI의 분열이 두드러졌다. 잉글랜드 FA는 각 협회에 관할 구역의 선수만 선택하도록 요청했지만, IFA는 그렇지 않았다. 1949–50 시즌까지 IFA는 정기적으로 자유국에서 태어난 선수들을 선발했다.
FAI는 아일랜드 공화국 선수들이 IFA의 아일랜드 팀으로 출전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 1953년 FIFA는 두 팀 모두 '아일랜드'로 지칭될 수 없다고 판결하고, FAI 팀은 ''아일랜드 공화국'', IFA 팀은 ''북아일랜드''로 지정하도록 결정했다.
5. 1. 최다 출장 선수

순위 | 선수 | 출장 | 골 | 활동 기간 |
---|---|---|---|---|
1 | 엘리샤 스콧 | 31 | 0 | 1920–1936 |
2 | 올퍼트 스탠필드 | 30 | 11 | 1887–1897 |
3 | 로버트 밀른 | 27 | 2 | 1894–1906 |
4 | 사무엘 토란스 | 26 | 1 | 1889–1901 |
5 | 빌리 길레스피 | 25 | 13 | 1913–1930 |
빌리 스콧 | 0 | 1903–1913 | ||
7 | 잭 페덴 | 24 | 7 | 1887–1899 |
8 | 잭 존스 | 23 | 0 | 1930–1937 |
빌 레이시 | 1 | 1927–1930 | ||
10 | 조니 달링 | 22 | 1 | 1897–1912 |
5. 2. 최다 득점 선수

순위 | 선수 | 골 | 출장 | 비율 | 선수 경력 |
---|---|---|---|---|---|
1 | 빌리 길레스피 | 13 | 25 | 0.52 | 1913–1930 |
2 | 조 뱀브릭 | 12 | 11 | 1.09 | 1928–1938 |
3 | 올퍼트 스탠필드 | 11 | 30 | 0.37 | 1887–1897 |
4 | 데이비 월시 | 7 | 11 | 0.64 | 1946–1950 |
잭 페든 | 24 | 0.29 | 1887–1899 | ||
6 | 해럴드 슬론 | 5 | 8 | 0.63 | 1903–1909 |
알렉스 스티븐슨 | 19 | 0.26 | 1933–1947 | ||
8 | 지미 던 | 4 | 7 | 0.43 | 1928–1932 |
윌리엄 보이드 달턴 | 11 | 0.36 | 1888–1894 | ||
지미 켈리 | 11 | 0.36 | 1931–1936 | ||
조지 개피킨 | 15 | 0.27 | 1890–1895 | ||
6. 대회 기록
아일랜드는 1913–14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단독 우승을 차지했다.[7] 1903년에는 골득실차가 적용되기 전, 잉글랜드, 스코틀랜드와 공동 우승을 차지했다.[7]
1902–03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에서 아일랜드는 잭 커윈, 빌리 스콧, 빌리 매크라켄, 로버트 밀른 등을 중심으로 셀틱 파크에서 스코틀랜드를 2-0으로 꺾으며 사상 처음으로 스코틀랜드를 상대로 승리했다.
1913–14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에서는 발 해리스가 주장, 빌리 길레스피, 빌 레이시등의 활약으로 웨일스를 원정에서 2-1로 이기고, 미들즈브러의 에어섬 파크에서 잉글랜드를 3-0으로 완파했다. 스코틀랜드와의 홈 경기에서 1-1 무승부를 기록하며 제1차 세계 대전 이전 마지막 대회에서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전쟁 이후 재개된 1919-20 시즌에는 8명의 새로운 선수를 기용하며 부진했고, 이후 20년 동안 두 번의 준우승을 기록했다. 1923년 10월 10일, 톰 파커슨, 샘 어빙, 바비 어빈 등이 포함된 팀은 윈저 파크에서 잉글랜드를 2-1로 꺾기도 했다.
1930년 2월 2일, 조 뱀브릭은 자신의 클럽 홈 구장에서 웨일스를 상대로 6골을 몰아넣으며 7-0 대승을 이끌었다. 이는 대회 역사상 한 경기에서 한 선수가 기록한 최다 득점 기록으로 남아있다.[7]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대회가 중단되기 전, 1938-39 시즌에는 모든 경기에서 패하며 최하위를 기록했다.
1949–50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은 FIFA 월드컵 예선을 겸하여 치러졌으며, 아일랜드는 렉섬의 레이스코스 그라운드에서 열린 웨일스와의 경기에서 마지막으로 아일랜드 전체 선수로 구성된 팀을 출전시켰다. 이 경기에서 아일랜드는 톰 아헌, 레그 라이언, 데비 월시, 콘 마틴 등 아일랜드 자유국 출신 선수 4명을 포함시켰는데, 이들은 모두 이전에 FAI 대표팀 소속으로 월드컵 예선 경기를 치렀다.[21]
1928년 하계 올림픽 축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FIFA는 모든 회원 협회가 참가하는 선수들의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브로큰 타임" 지불을 제공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이에 스코틀랜드, 잉글랜드, 아일랜드, 웨일스의 축구 협회는 회의를 열어 FIFA에서 사임하기로 합의했다.[36] 그 결과, 아일랜드는 처음 세 번의 월드컵 대회에 참가하지 않았다.
영국 홈 챔피언십 |
---|
우승 (2) |
단독 우승 (1): 1914 |
공동 우승 (1): 1903 |
6. 1. FIFA 월드컵
FIFA 월드컵 기록 | FIFA 월드컵 예선 기록 | |||||||||||||||
---|---|---|---|---|---|---|---|---|---|---|---|---|---|---|---|---|
연도 | 라운드 | 순위 | 경기 수 | 승 | 무* | 패 | 득점 | 실점 | 경기 수 | 승 | 무 | 패 | 득점 | 실점 | ||
1930 | 불참 | 불참 | ||||||||||||||
1934 | ||||||||||||||||
1938 | ||||||||||||||||
1950 | 예선 탈락 | 3 | 0 | 1 | 2 | 4 | 17 | |||||||||
합계 | - | 0/4 | 0 | 0 | 0 | 0 | 0 | 0 | 2 | 0 | 1 | 2 | 4 | 17 |
1928년 하계 올림픽 축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FIFA는 모든 회원 협회가 참가하는 선수들의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브로큰 타임" 지불을 제공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이에 스코틀랜드, 잉글랜드, 아일랜드, 웨일스의 축구 협회는 회의를 열어 FIFA에서 사임하기로 합의했다.[36] 그 결과, 아일랜드는 처음 세 번의 월드컵 대회에 참가하지 않았다.
아일랜드 FA는 다른 홈 네이션스와 함께 월드컵에 출전하기 위해 FIFA에 재가입했으며, 1949–50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이 예선 조로 사용되었다. 아일랜드는 홈 네이션 팀이 참가한 최초의 월드컵 예선을 개최하여 벨파스트에서 스코틀랜드에 2-8로 패했으며, 결국 웨일스에서 1점을 얻는 데 그치며 조 최하위를 기록했다.
6. 2.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
1913–14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에서 아일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단독 우승을 차지했다.[7] 1903년에는 골득실차가 적용되기 전, 잉글랜드, 스코틀랜드와 공동 우승을 차지하며 처음으로 우승 타이틀을 획득했다.[7]1902–03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에서 아일랜드는 잭 커윈, 빌리 스콧, 빌리 매크라켄, 로버트 밀른 등의 선수들을 중심으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에 이어 공동 우승을 달성했다. 특히, 셀틱 파크에서 스코틀랜드를 2-0으로 꺾으며 사상 처음으로 스코틀랜드를 상대로 승리했다.
1913–14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에서는 발 해리스가 주장, 빌리 길레스피, 빌 레이시등의 활약으로 웨일스를 원정에서 2-1로 이기고, 미들즈브러의 에어섬 파크에서 잉글랜드를 3-0으로 완파하며 우승을 확정지었다. 스코틀랜드와의 홈 경기에서 1-1 무승부를 기록하며 제1차 세계 대전 이전 마지막 대회에서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전쟁 이후 재개된 1919-20 시즌에는 8명의 새로운 선수를 기용하며 부진한 모습을 보였고, 이후 20년 동안 두 번의 준우승을 기록하는 데 그쳤다. 1923년 10월 10일, 톰 파커슨, 샘 어빙, 바비 어빈 등이 포함된 팀은 윈저 파크에서 잉글랜드를 2-1로 꺾는 등 인상적인 경기를 펼치기도 했다.
1930년 2월 2일, 조 뱀브릭은 자신의 클럽 홈 구장에서 웨일스를 상대로 6골을 몰아넣으며 7-0 대승을 이끌었다. 이는 대회 역사상 한 경기에서 한 선수가 기록한 최다 득점 기록으로 남아있다.[7]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대회가 중단되기 전, 1938-39 시즌에는 모든 경기에서 패하며 최하위를 기록했다.
1949–50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은 FIFA 월드컵 예선을 겸하여 치러졌으며, 아일랜드는 렉섬의 레이스코스 그라운드에서 열린 웨일스와의 경기에서 마지막으로 아일랜드 전체 선수로 구성된 팀을 출전시켰다. 이 경기에서 아일랜드는 톰 아헌, 레그 라이언, 데비 월시, 콘 마틴 등 아일랜드 자유국 출신 선수 4명을 포함시켰는데, 이들은 모두 이전에 FAI 대표팀 소속으로 월드컵 예선 경기를 치렀다.[21]
- '''영국 홈 챔피언십'''
- * '''우승 (2)'''
- ** '''단독 우승 (1)''': 1914
- ** '''공동 우승 (1)''':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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